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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의 역사적 유래 백제시대의 동구 통일신라시대의 동구 고려시대의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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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이 집권적 국가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지방에 대한 통치도 이전의 재지수장층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에서 중앙의 직접적인 통치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배방식의 전환으로 인해 지방지배조직의 정비와 지방관의 파견이 이루어졌다. 그 시기는 근초고왕대로 추측되며, 이 시기에 마련된 지방통치조직이 담로체제이다. 담로체제는 이전에 마한을 구성하였던 소국들을 토대로 하여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담로체제는 사비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방-군-성체제로 개편되었다. 그리하여 세로 수도가 된 사비[현 부여]는 5부로 나누어지고, 지방은 전국이 크게 5방으로 나누어졌다. 이 5방은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비시대 말기에는 5부로도 표기되었다. 각 방의 중심지인 치소는 방성이라 하였으며, 장관으로는 방령 1인을 두되 16관등제에서 제2관등인 달솔을 임명하였다. 각 방은 10개 내지 6.7개의 군을 포괄하고 있어서 광역의 군관수 기능을 하였으며, 독자적인 직할시와 그에 부속되는 성[현]을 통솔하고 있었다. 군은 방의 중심지인 방성과 기본적으로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는 방령의 관할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군 전체의 수는 모두 37개였다. 이 방성과 군에는 평균 5~6개의 현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현의 총수는 200~250개로 파악된다. 이러한 5방제의 확립은 곧 백제 지방통치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비시대에 동구를 포함한 대전 지방은 5방제 하에서 북방역인 웅진성[현 공주]에 속해 있었고, 지금의 회덕에 우술군, 유성에 노사지현, 덕진에 소비포현, 진잠에 진현현이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구지역은 주로 우술군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의 영토확장사업이 대전 동쪽의 험준한 산맥 앞에서 멈추게 되자, 동구지역은 신라와의 접경지대가 됨으로써 전화의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전지방은 동쪽 금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구지역은 백제의 방위상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기에 이른다.

5세기 중엽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러나 웅진시대초기 백제의 정세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겹쳐 불안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그 뒤 동성왕과 무녕왕대를 거치면서 점차 안정되어 갔다. 바로 이 시기 동구는 백제의 서사.문화 등 상호교류를 할 때 통과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지정학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었던 화친과 전쟁은 주로 대전의 동구지역을 거쳐 옥천으로 가는 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사비시대의 동구 지역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내세울 만한 문헌과 유적은 별로 없다. 다만 백제가 망하기 직전인 660년 7월 전략적인 가치를 두고 백제 조정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던 탄현을 동구지역으로 지정하는 견해가 있다. 탄현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음은 일찍이 충신 성충도 죽기 전에 옥중에서 탄현과 백마강을 잘 지켜 국방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의자왕에게 당부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백제가 망한 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의자왕과 네 왕자 및 88명의 대신과 장사 그리고 1만 2천명의 백제민을 포로로 잡아가고, 당나라의 유인원과 신라의 김인문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사비성을 지켰다. 그러나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옛 영토에서는 곧바로 유민들에 의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장정을 다수 살해했기 때문에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나당연합군의 지배영역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부흥군은 사비성을 포위하여 당군과 신라군을 괴롭혔다. 이러한 사비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했으며,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웅진도독에 임명된 왕문도도 백제 부흥군 토벌의 사명을 띠고 바다를 거너와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에서 나당연합군과 합류하였다.

대전 동구지역은 서라벌[경주]에서 웅진[공주]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옥천에 병참기지를 두고 강이나 탄현을 통해 사비성[부여]에 있는 군대의 군량미를 수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부흥군의 전략상 요충지였다. 이때 당에서 건너온 웅진도독 왕문도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태종 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논산의 노성에 있었던 이례성을 공격하여 이를 탈환했고, 백제부흥군에 호응하였던 이 지역은 20여 성도 모두 신라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당나라 군사들의 가장 두려웠던 존재였던 계족산성의 백제군을 소탕하기 위해 신라군은 산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면서 끈질긴 공격 끝에 마침내 이 성을 함락시켰다. 이와 같이 백제의 부흥운동 과정에서도 동구지역은 중요한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