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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의 역사적 유래 백제시대의 동구 통일신라시대의 동구 고려시대의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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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지방조직을 정비했다. 그리하여 당의 세력이 완전히 구측된 문무왕 17, 18년경(677, 678)에 걸친 시기에 새로운 지방행정제도가 완성되는데, 이 때에 완성된 지방제도는 9주 5소경제로 설명된다. 먼저 9주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터에 균등하게 각기 3주씩 설치하였다. 백제의 고지에는 웅천주, 완산주, 무진주 등의 3개주가 설치되었으며, 각기 중심이 되는 고을로는 웅주, 완주, 무주가 선택되었다. 그 뒤 경덕왕 16년(757)에 대대적인 지명의 개명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웅천주는 웅주로, 완산주는 전주로, 무진주는 무주로 변경되어 신라말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주의 장관인 군주도 문무왕때 총관으로, 다시 원성왕때 도독으로 개칭되었다. 이 주의 아래에는 군을 두어 태수가 다스렸고, 군 아래에는 현을 두어 현령이 다스렸다.

대전 부근을 포함한 충남일대를 다스린 웅천주는 경덕왕 16년(757)개편 당시 하나의 소경과 13개 군, 29개 현을 관장하였으며, 주에 직속된 현은 2개였다. 또한 당시 지방 고을 이름을 중국식으로 개칭하였는데, 대전 부근에 해당되는 군현으로는 진잠의 진령현[진현군], 회덕의 비풍군[우술군], 유성의 유성현[누사지현], 덕진의 적오현[소비포현]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대전 동구 지역은 주로 비풍군에 속해 있었다.

현덕왕 14년(822) 김현창이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김헌창의 반란군과 관군의 주력부대가 대전 동구의 인근에서 일전을 벌였다. 웅천주도독 김헌창은 그의 아버지 김주원이 선덕왕 사망 후 귀족회의에서 정당한 왕위계승권자로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성왕의 무력에 밀려 왕이 되지 못한 점과 원성왕계의 인사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 계속된 재난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사회경제적으로 불안하였던 서부지역의 중앙에 대한 반발을 적절히 이용하여, 웅천주를 세력의 근거로 삼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여 독립국가의 건립을 선포하였다. 나아가 웅천주 외에 무진주.완산주.청주.사벌주의 4주와 국원경.서원경.금관경 등 3개의 소경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니 지금의 충청.전라와 경상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