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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의 역사적 유래 백제시대의 동구 통일신라시대의 동구 고려시대의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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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지방제도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이를 모체로 다소의 수정을 거쳐 태종 13년(1412)에 확립되었다. 이 선초의 지방제도는 부분적인 변동은 있었지만, 대체로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초기 군현은 330여 고을로 정리되고, 각 고을에는 고을의 등급에 따라 중앙으로부터 부윤(종2품).대도호부사(정3품).목사(정3품).도호부사(종3품).군사(종4품).현령(종5품).현감(종6품)등의 수령이 파견되었다. 이 시기 대전지역은 회덕현.진잠현과 공주목의 일부(고려시기 공주의 속현이었던 유성현과 덕진현)에 해당하는데, 동구지역은 공주목 관할의 산내 부근과 청주목 관할의 세천 부근을 제외한 대부분이 회덕현에 해당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기에는 군현의 정비과정에서 이전의 속현이 대부분 정리되어 소멸되었다. 속현의 정리는 속현 자체가 승격되어 주현화하는 경우를 비롯하여 2개 이상의 속현이 병합되어 주현으로 승격된 경우, 속현이 이속된 경우, 속현이 직촌화 된 경우등이 있었다. 후대의 여러 읍지나 『대동지지』의 각 방면조를 보면, 과거 속현의 이름이었던 것이 면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직촌화되어 면으로 개편된 것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에는 향.부곡.소 등도 현으로 승격되거나 이속되고 직촌화 됨으로써 대부분 소멸되어 갔다. 이 향.부곡.소도 대개 조선후기 면리제의 실시에 따라 면이라 리로 개편된 것이 많았다. 대전시 동구의 북부지역에 해당되는 내탑동.사성동.신촌동.오동.주촌동.직동.추동(이상 법정동명)등은 조선초기에는 청주목 주안향에 해당한 지역으로 조선후기 면리제가 실시되면서 청주목 주안면이 되었고, 이 지역은 다시 1895년에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회덕현조에는 월경지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월경지는 비입지 혹은 비지라고도 하는데, 군현의 한 구역이지만 경내에 있지 않고 중간에 자리하는 다른 고을의 경내를 넘어서 따라 위치하면서, 소재읍의 지배를 받지 않고 격리된 소속읍의 지배를 받는 구역을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회덕현에는 유성의 동쪽 낭산리가 회덕현의 남면에 들어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이 흐의 면리제에서 공주목의 산내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7세기에 이르면 면리제가 전국적으로 정착되어 간다. 주.부.군.현 밑에는 면이 있고, 면 밑에 리.촌.동이 있었으며, 면의 장은 집강.풍현.면임.약정 등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리.촌.동의 장도 존위.이정.동수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하는 외관은 군현단위에 그침으로 면의 운영은 지방자치의 성향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면리제의 구체적 내용이 전국적으로 처음 보이는 것은 <<여지도서>>(1759)이다. 이 <<여지도서>>와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를 통해 당시 동구지역의 상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에 기록되어 있는 면으로 오늘날의 대전 동구지역에 해당하는 곳은 회덕현의 동면.외남면.일도면과 공주목의 산내면, 청주목의 주안면 일부가 해당된다. <<여지도서>>에는 행정리명이 <<호구총수>>에는 자연촌명이 기록되어있는데, 당시 동면은 3개의 행정동리와 17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외남면은 3개의 행정동리와 8개의 자연촌, 일도면은 3개의 행정동리와 17개의 자연촌, 산내면은 6개의 행정동리와 40개의 자연촌, 주안면은 11개의 행정동리와 16개이 자연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